신촌의 어느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세 분을 본다. 다행이다. 기도하는 분들이. 그러나 그 수 없이 오고가는 젊은이들이 카페와 음식점 서점 화장품 가계에 버글거리나, 심지어 이 교회 카페와 세미나실에 가득하나, 기도하러 오는 이가 없다.
페이스북으로 온라인 게임으로 케이블 TV로 술로 밤을 새우며 떠들어대는 소리는 울려퍼지나,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깨우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졸립다 말하며 잠을 청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과 그 아들들 대신 지성소에서 밤을 새던 사무엘을 택해, 그들 대신 다음 세대 지도자로 세우신다.
그 일이 지금 이곳에서도 일어나리
이걸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 같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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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 1.21)
–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롬 12.15)
–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시 73.25-26)
– 하나님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확실하고 변치않는 것이다. (존 파이퍼)
가장 힘있고 실력있을 때, 한 이집트 왕자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을 꿈으로 삼고 이루고자 하였다.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 노예 해방.
그러나 그가 그 힘과 세력을 다 잃어버리고, 그가 젊어서 왕국에서 배운 것들은 가물가물하고, 젊음의 힘을 빠지고, 이제는 보잘것 없는 시골 목동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하나님에게 선택받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꿈을 이룬다.
모세는 젊을 때의 이상과 힘과 실력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참된 의미 있는 길을 가게 되었다.
어느 새로 믿은 성도가 문자를 보내서, 잘 안 믿어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상황에서 문자 보낸 것 자체가 겨자 씨 만한 믿음을 가진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은 우리에게 “겨자 씨”만한 믿음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씨만 있으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신다. 그러니, 내가 자신감에 넘쳐있을 때에도, 혹은 내가 완전히 낙망해 있을 때에도, 항상 일관되게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기에 잘난 척 하거나 움추려 들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